FRANCIS KINSLER
권세열(權世烈, Francis Kinsler) 선교사는 20세기 한국교회와 사회에 크게 헌신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다. 1904년 1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 저먼타운에서 아더(Arthur) 킨슬러와 베르타(Bertha)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목사가 된 형과 더불어 두 누이 역시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가문 속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의 길을 다짐한 그는 1925년 매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28년 졸업했다. 그해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지부에 배속되었으며, 숭실학교에서 성경과 영문학을 가르치며 한국 사역을 시작했다.
1929년 그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모아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는 ‘개척구락부’를 조직했다. 이는 이후 대한청소년성경구락부로 발전해 해방 후 전국에 17개 지부, 7만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1930년에는 약혼자였던 도로시 우드러프(Dorothy Woodruff, 권도희)와 내한 직후 결혼하여 선교의 동역자로 함께 걸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1940년 강제로 추방되었다.
해방 이후 1948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대구 등지에서 성경구락부와 문맹 퇴치 운동, 신학교 교육에 힘썼으며, 장로회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교장 대리를 맡기도 했다. 또한 1951년과 1957년 주한 북장로교 선교부 대표를 역임하며 한국교회의 성장과 신학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 동안 그는 피난을 가지 않고 부산에 남아 6만여 명의 피난민을 구호했다. 세계교회봉사회(Church World Service)의 구호품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며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했고, 군목 제도 창설과 포로수용소 전도에도 힘써 한국 교회와 군 교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교회와 미군, 세계 교회 간의 가교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로마서와 요한복음 주석을 집필하고 1,000여 명 이상의 목회자를 양성했으며, 젊은 교수들과 목회자들의 유학을 적극 지원하여 한국 신학 교육의 기틀을 세웠다. 1950년대에는 에큐메니칼 신학과 선교 현지 이양을 지지하며 한국교회의 세계적 연대를 도왔다.
42년간 한국에서 헌신한 권세열 선교사는 1970년 정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고, 1992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듀알테에서 소천했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교육과 구호, 신학과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존경받는 선교사였다.

전시 구호 활동 및 구락부 재건
성경구락부 시작(평양)
성경구락부 재개(신학생 대상)
에큐메니칼 신학 지지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복귀
현지 이양 전략 지지 및 실행
교육문화훈장 수여
42년간의 한국 선교 은퇴
성경구락부 폐쇄(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교육 탄압)
뉴욕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튼 교회에서 목회
전쟁난민 구호, 고아원과 모자원 설립
한국 사역 시작
미주 한인 신학교 강의 및 설교
1928
1929
1932
성경 교육 및 신학교육 집중 전환
1938
1942 - 1947
1948
1948 - 1970
1949
1950
1954
1956-1964
1965
1969
1976-1992




